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응우옌 왕조 (문단 편집) == 현대 베트남에서의 평가 == '''나쁘다'''. 남북베트남을 완전 통일한 최초의 왕조이면서 최후의 왕조이고 왕조 자체는 1945년[* 길게보면 [[베트남국]]이 멸망한 1955년]까지 이어졌으나 실질적으로 제기능을 한 것은 그의 반도 안되는 60여년 정도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프랑스 식민당국에서는 통치의 정당성을 위해 응우옌 왕조를 의도적으로 폄하했던 경향이 강하며, 베트남의 독립운동을 주도한 민족주의 진영이나 공산주의 진영에서도 애초에 건국 자체를 프랑스와 태국 등 외세의 힘을 빌려서 이룩했다는 점과 결과적으로는 근대화에 실패하고 식민지로 전락했다는 점들 때문에 박하게 평가하기는 매한가지였다. 이로 인해 베트남의 남북분단 이후 어느 쪽에서도 응우옌 왕조에 대해 좋은 평가를 해줄 정치적인 이유가 없었다. 군주정 자체와 상극인 공산주의 북베트남은 물론이고, 남베트남 역시 [[베트남 공화국]]의 건국세력인 근로인위혁명당과 혁명위원회 양쪽 모두가 바오다이에게 매우 적대적이었기에 바오다이의 조상들인 광남 응우옌 왕조를 일부러 재평가해줄 이유가 없었다. 그나마 1990년대 중반 이후로는 응우옌 왕조가 생각보다 근대적인 모습을 지녔다는 점이나 쇄국이라고 해도 외국문물을 무조건 차단하지는 않았다는 점이 어느 정도 재조명되면서 상당부분 재평가받고 있으나 베트남이 독립한 이래로 프랑스, 미국, 중국과 싸워 이겼고, 그 이전에도 중국과 몽골의 대군을 상대로 여러차례 이겨본 전적이 있는데 응우옌 왕조가 전성기 시절에 참파를 완전히 멸망시키고 캄보디아를 분할하는 등 강력한 군사력을 과시했을 때도 있었기는 했어도 결과적으로 프랑스를 상대로 이겨보지는 못하고 통치권을 내주고야 말았으니 응우엔 왕조에 대한 이미지가 여전히 좋을 수가 없기는 하다. '''사실 19세기 근대화라는 측면만 본다면 타 한자문화권 국가인 [[청나라|중국]], [[조선|한국]], [[에도 막부|일본]]보다 베트남은 훨씬 더 유리한 위치에 있었다.''' 우선 조선과 청나라, 에도막부는 18세기 말~19세기 초를 기점으로 모두 쇠퇴기에 접어들어 노쇠한 모습을 보였지만, 응우옌 왕조는 떠이선 왕조에 비하면 덜 개혁적이었을지라도 신생정권이었기 때문에[* 물론 응우옌 왕가 자체는 이미 남북조 시대 시절부터 권력을 차지하고 있었지만 떠이선 왕조 시기를 거치면서 응우옌 왕가와 권신들이 잇따라 죽거나 숙청을 당하여 몰락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물론 구 지주들에게 특권을 주는 법안을 내놓기는 했지만 어쨌든 변화 자체는 불가피했던 것.] 세 나라들에 비해 사회가 덜 경직되었다. 또한 프랑스로부터 도움을 얻어 건국했으므로 일찍이 서양의 기술을 받아들여 근대적 군사력을 보유할 수 있었고 그렇기에 단시간이나마 국력이 융성할 수 있던 것이었다. 그러나 해당기간 동안 경제와 행정의 근대화보다는 유교질서 강화 및 대외확장에 몰두하면서도 내부통제가 잘 안되는 모습도 같이 보여주었는데, 마침 프랑스도 혼란기였으므로 응우옌 왕조는 외세에 대한 걱정 없이 대외확장을 벌일 수 있었고, 침략의 명분이 되던 기독교 탄압도 따지고 보면 서양 열강들이 선교사들을 이용하는 경우가 많다는 점을 생각하면 방어기제로 작용할 수밖에 없었지만 하필이면 유럽 열강들이 [[산업혁명]] 버프를 얻으면서 당대의 베트남과는 비교가 불가능할 정도로 엄청나게 발전했던 시기라는 것이 응우옌 왕조 입장에서 큰 불행이었고 결과적으로 볼 때는 실책이 될 수밖에 없었다. 즉, 내부의 문제점도 엄연히 있기는 했지만 운빨이 안 좋았던 측면도 부분적으로 작용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